‘그곳’에 이제 그는 없다. 그림자라도 비쳐 있으려나 싶었지만 아무런 흔적조차 없이 어스름한 기억만 남기고 내 곁을 떠났다. 

 그저께도 습관처럼 동네 산책길로 들어섰다. 나 혼자다. 떠난 자보다 남은 자가 더 외로운 법인가. 어디엔가 그분이 있을 듯해 주위를 살핀다. 가지가 늘어선 버드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서, 아니면 풀이 성글게 난 길섶에 서서 돌아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 한 분이 등을 보이며 멀리서 걷고 있다. 괜스레 그분인가 싶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보지만 매번 헛수고다.

  임종 며칠 전에 전화기 너머로 그분이 내게 그랬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간다고. 나는 병문안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작은 수고라도 끼치기가 민망했던가. 마지막 모습을 차마 보이기 싫어 훌쩍 떠나버렸다. 

 그분은 말기 암으로 투병한 지 1년 남짓 되었다. 아파트의 한 단지에 살고 있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의 몸 상태와 치료계획은 어떤지, 밥은 잘 먹는지, 일상과 마음가짐은 어떠한지, 자신에 얽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았다. 동병상련이라고, 나도 암 투병 중이니 그분의 형편이 내 일처럼 느껴졌다. 큰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도 나와 함께 있으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늘 감사했다. 

  몇 주 교회 주일예배에 빠지길래 무슨 일인가 알아보았다. 제주도 가족 여행을 다녀와서 피로가 쌓여 회복 중이라 했다. 그러다 가슴에 통증을 느끼던 저녁 무렵 부랴부랴 호스피스 병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족과 친지들에게 일일이 안부를 남기고 주변 정리를 모두 끝낸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들어간 것이다. 

장례를 치르는 어느 순간에도 통곡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소망을 이루어 천국으로 가는 고인에 대한 예의요,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경건의 표시이다. 세상을 떠났기에 이제는 못다 한 사랑을 더이상 나눌 수 없는 안타까운 이별의 눈물만 있을 뿐이다. 

   그분은 한 줌의 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담겨 가족 품에 안겼다. 육신의 증거를 남겨두고 홀로 가셨다.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은 오직 이것뿐이다. 나머지는 남은 자들의 가슴 속에 추억이란 이름으로 알알이 맺혔다. 사람은 육신으로 태어나지만 죽어서는 영혼만 남아 하늘로 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남겨져 보이는 것과 떠나서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다.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떠나는 게 인생이다. 떠나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듯 소중히 여기며 살 일이다. 나는 그분이 탄 기다란 검은색 영구차를 뒤따르며 영생의 길을 배웅했다. 천천히 갔으면 좋으련만 처음에는 느릿하다가 큰길에 나서서는 뭐가 그리 급한지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분의 마지막 생을 닮았다. 

 그날은 햇살이 유난히 밝고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분은 살던 동네 가까운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명으로 살아생전 소중히 간직하던 성경 구절이 새겨졌다. 디모데후서 4장 7절 말씀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분은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일에 평생을 바쳤다. 세상의 온갖 유혹을 뿌리치며 죽는 날까지 잠시도 한눈팔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살았다. 성경 통독을 수십 차례, 가시기 얼마 전에는 한 달에 일 회독 씩 읽어나갔다. 하나님 말씀과 한 마음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한 줄로 이어진 한 떼의 구름이 서쪽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흐뭇한 미소 띤 그분의 모습이 아련하다. 나는 저 너머 구름 끝이 희미해질 때까지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나 먼저 가 있을 테니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이제 아프지 말고 마냥 행복하라 하신다. 

 오늘 산책길에도 그와 동행 중이다. 우리의 동행은 내가 기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며칠 안 보던 사이에 버드나무 가지가 길게 늘어져 있다. 우리가 늘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벤치의 남은 자리에 기다란 잎사귀 하나 살포시 내려앉는다. 다시 만나면 아픈 이야기 하지 말고 환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으며 꽃 피고 새 우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내일부터는 그분의 천국 이야기를 듣고 싶다. 지금 있는 ‘그곳’이 얼마나 놀라운지, 오직 기쁨으로 충만한 세상은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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